
이음새가 좋은 말
너랑 나랑 또랑물 소리로 만나서
사랑하기 좋은 말
- 서정춘, '랑’ 전문

팔순 고갯마루의 서정춘 시인이 제 7시집 ‘랑’을 펴냈다. 시집은 39쪽에 작품 31편 뿐이다. 작품들 역시 10행 미만으로 짧다. 시 제목 짧기로 치면 기네스북 감이다. 이 시는 한 단어로만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너랑 나랑’, ‘또랑물’....
‘랑’이라는 단어는 징검다리와 어깨동무 역할을 한다. 외딴섬 분교, 포구에서 ‘팔랑팔랑’ 나부끼던 깃발도 ‘랑’이 있어 외롭지 않고 힘이 있어 보였다.
‘랑’이라는 한 단어는 생각 이상으로 큰 에너지를 품고 있다. 한 단어이지만 모음으로 끝나는 체언의 뒤에 붙어, 조연으로 태어나 둘 이상이 만나 대등한 자격을 갖추는 접속 조사이다.
‘랑’은 어떤 행동이나 일을 함께 할 대상의 품격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랑’은 그렇게 상대를 정겹게 맞고 그를 더욱 빛내주는 역할을 한다. ‘랑’은 상부상조, 상호작용의 정신을 지녔다.
요즘 세상에는 말들이 난무한다. 난장판이다. 우리 속담에 “쌀은 쏟고 주워도 말은 하고 못 줍는다”라는 표현이 있다. 물고기는 입으로 낚인다. 물고기를 낚은 사람도 천상 입으로 낚인다. 말의 폐해가 그렇다. 사람의 입은 하나이고 귀가 둘이다. 경청의 중요성을 상징한다. 말이 많으면 얽히고 설키기 마련이다. 그래서 말이 많은 만큼 몸을 해친다.
구약성서 잠언에는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라는 표현이 있다. 석가모니는 “모든 것은 이 마음에 있으며 저 마음에 있다”고 말했다. 이 마음은 탐욕과 집착이고 저 마음은 언어 표현 이전의 마음이다.
시중에 시랍시고, 스토리텔링이라는 미명 하에 난해하고 말장난을 일삼는 글나부랭이들이 넘친다. 톨스토이는 “깊은 지혜를 지니고 있으면 지닐수록 생각을 나타내는 말은 더욱더 단순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말은 사상의 표현”이라고 강조했다.
입은 마음의 문이다. 말은 마음의 그림이다. 시인은 그런 언어의 마술사이다. 일상적인 유통언어를 낯설고 맑은 언어로 전환해 색다른 풍경화를 그린다. 독자는 그 풍경 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런 감각과 기교를 선보인 서정춘 시인은 1941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신문배달 소년시절을 거쳐 어느 날 영랑과 소월의 시집에 빠져 시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서정춘 시인은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시집으로 ‘죽편’, ‘봄, 파르티잔’, ‘귀’, ‘물방울은 즐겁다’, ‘이슬에 사무치다’, ‘하류’, 시선집 ‘캘린더 호수’, 등단 50주년 기념집 ‘서정춘이라는 시인’ 등이 있다. 박용래문학상, 순천문학상, 유심작품상, 최계락문학상, 백자예술상을 수상했다.
글‧사진: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