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풍경이 있는 삶] 오세영, ‘바닷가에서’

사는 길 가파르고 외롭거든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박상건 기자 2025-06-12 17:08:02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있다.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

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 있다.

 

- 오세영, ‘바닷가에서’ 전문


무슬목 바닷가(사진=섬문화연구소DB)



나는 30년째 매년 섬에서 시인들과 일반인들이 어우러져 섬사랑시인학교 캠프를 연다. 그해 여름, 신지도 보길도 덕적도 바닷가에서 어민들과 함께 하는 촛불시낭송 시간에 이 시를 음미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 
 

외딴 섬 아이들은 시낭송용 종이컵 안에 피어 문 불꽃을 신기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전기 시설이 없는 바닷가에서 시낭송 작품이 실린 팜플렛을 보려면 촛불이 필요했고, 촛불은 사유와 명상 분위기를 돋우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원로시인 오세영 교수는 조무래기를 무릎에 보듬은 주민들 앞으로 촛불을 켜들고 나와서 이 시를 낭송했다.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바닷가/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 
 

인생을 살만큼 산 시인이기에 시의 울림은 더욱 크고 실감나게 전달됐다. 배경음으로 깔린 통기타 반주도 좋았지만, 자연 그대로 잔잔하게 나부끼는 파도소리 역시 시낭송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섬사랑시인학교 캠프장은 그대로 바닷가이다. 밀려오는 파도소리 따라 다시 시인의 낭송이 이어졌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그냥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거기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다시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이느니, 그렇게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거기 있다.”
 

바닷가에서는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헹구기에 충분하다. 살며 막닥뜨린 답답하고 슬픈 마음이 부서지는 파도에 버무려져 산산이 부서질 때 느끼는 그 카타르시스는 섬여행에서 맛볼 수 있는 특전 중 하나이다. 

관매도 노을(사진=섬문화연구소DB)

 

저 바다를 보면, 파도는 바람 불면 부는대로 물결친다. 바람의 세기만큼 거칠기도 하고 이내 조잘조잘 백사장에 다가와서는 무심히 스며든다. 적멸이다. 다 내려놓고 사라지는 공함이다. 때로 몽돌 사이사이 열기를 식해주다가 돌틈에서 해조음을 켜며 사라진다. 
 

그렇게 바다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 있음을 보여준다. 바다는 꼭 한 번은 밀물이 되고, 그 만큼을 다시 비우는 썰물의 시간을 통해 수평을 이룬다. 그 수평선에 “아득히 지는 일몰”과 “마침내 밝히는 여명”의 시간으로 반반씩 어우러져 공존한다. 
 

영원한 삶은 없다. 모든 것은 찰나이다. 그래서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다. 찬란한 태양은 다시 기울고, 지는 해는 내일 다시 떠오른다. 저기 “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이 모든 게 자연의 섭리이다. 수평을 이루는 자연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면, 그런 삶에 감동하고 찬탄할 줄 안다면 그것이 자연친화적인 삶이 아닐까. 그래서, 루소는 다시 말한다. 인위적인 삶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글‧사진: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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