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파도는 네덜란드 선장 하멜에 의해 널리 알려진 섬이다. 하멜은 제주 앞 바다에서 많은 선원을 잃고 표류 중에 병력을 이끌고 구조하러 간 이원진 제주목사에 의해 구제했다. 하멜은 “우리 많은 기독교도들이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을 정도로 융숭한 대접을 이교도들로부터 받았다”고 말했다. 1653년 견문기 ‘한국유수기’를 통해 이 이야기는 서양에 널리 알려졌다.

제주도 우스갯말로 “가파도(갚아도)좋고 마라도(말아도)좋다”라는 말이 있다. 가파도와 마라도 사람들은 그렇게 외로운 섬 생활을 한 물결로 보듬고 살았다.
마라도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마을을 이루는 섬이다. 원래 가파리에 속했다가 1981년 마라리로 분리됐다. 섬 면적은 0.3㎢, 해안선 길이는 4.2㎞. 섬 형태가 길쭉한 고구마를 닮았다.
마라도는 2000년 섬 전체가 천연 기념물 제423호로 지정됐다.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할 때는 제주 특유의 나무절구 ‘남방애’를 만드는 소재였던 아름드리나무가 울창했으나 초창기 이주민들이 경작지를 마련하고자 숲을 태우면서 나무 없는 섬이 됐다. 섬에 뱀들이 많이 불을 놓았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나무 없는 섬에 호텔 신라가 1991년부터 ‘푸른 마라도 가꾸기’ 일환으로 해송식재 작업과 마라분교 화단 조성 작업을 진행 중이다. 남제주군이 2005년 남제주군은 마라도 푸른숲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해풍에 강한 해송과, 돈나무, 해국 등을 식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라도는 태풍급 강풍이 불면 나무가 뿌리째 뽑히기가 다반사이고 암반지대라는 지형적 요인으로 식생 환경이 최악인 섬이다.

마라도 최남단의 장군바위는 마라도 사람들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는다. 주민들은 이 바위에서 대대로 해신제를 지낸다. 그래서 이 바위를 오르는 것을 삼가는데, 일제 때 일본인들은 자기 나라 쪽을 향해 이곳에 신사참배를 했던 곳이다.
마라도 해안선은 해식애가 발달해 동굴과 기암괴석의 경관을 자랑한다. 마라도는 화산활동으로 용암이 분출하여 해수면 위로 솟아쳐 올라 굳어져 형성된 섬이다. 섬 전체는 거대한 현무암석 덩어리로 되어 있고, 이러한 암석이 해저에도 깔려 있어서 패류, 해조류, 연체류 등의 서식처로 제격이다. 그래서 해안선에는 해산물이 풍부한데 전복, 소라, 해삼, 성게, 미역, 톳이 풍부하다. 특히 봄, 여름에 잡히는 마라도 자리돔은 전국에서 손꼽힌다.

자리돔이 많이 잡히는 곳에 있는 선착장 이름이 자리덕 선착장이다. 자리돔 성어기에 마라도 주변에는 자리돔을 잡는 어선으로 진풍경을 연출한다. 자리돔은 한 자리에서 위 아래로 왔다 갔다 하면서 머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칼슘 성분이 풍부하고 자리물회, 자리구이, 자리무침, 자리젖 등으로 즐기는 향토음식이다.
자리돔 뿐만 아니라 마라도는 단골손님이 강태공들일 정도로 낚시 포인트로 유명하다. 주 어종은 벵에돔, 자리돔, 감성돔. 강태공들은 마라도와 가파도 사이를 오가며 낚시를 즐기는데, 해역에 영양물이 활발히 떠다녀 대형 돌돔과 벵에돔이 주요 타깃이다. 주민들은 일출 일몰 때 입질이 집중된다고 귀띔했다.
마라도 동쪽 해안은 태평양의 거센 파도에 침식된 수직절벽이다. ‘그정’이라고 부르는 이 절벽의 높이는 39m. 서쪽의 절벽 높이는 15m~30m이다. 남쪽과 북쪽 해안은 수려한 절경을 자랑한다.

마라도 해안은 암석이 불규칙하게 깔려 있어, 마라도를 입출항하는 선박들은 풍속과 풍향의 정도에 따라 네 곳의 작은 선착장을 바꿔가며 이용한다. 동북쪽 해안의 알살레덕 선착장, 동남해안의 장시덕 선착장, 서남해안의 신작로 선착장, 서북해안의 자리덕 선착장이 그것이다.
자리덕과 장시적 선착장은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려야 한다. 마라도 해류는 간만의 차가 가장 심한 사리 때에 시속 5~6마일 정도이나 물결이 일며 급류가 흘러서 이 때만은 해녀들이 잠수를 하지 않는다.
마라도 최고점인 해발 39m에 마라도등대가 있다. 선착장에서 직선거리로 500미터 정상 지점이다. 등대에서 내려다 본 바다는 동서남북이 망망대해. 등대 옥상이나 돌담에 올라서서 바다를 바라봤다.
찰나에 스치는 단어는 인생무생, 무념무상, 무아지경. 속절없는 우리네 인생이 무한한 해양공간에서 대비됐다. 한 줌 인생살이의 나그네를 비웃듯 푸르게 철썩이고, 다시 희끗희끗 해풍에 부딪치며 밀려오는, 태평양 어느 섬 혹은 어느 해안에서 출발했을 파도의 여정을 가는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러다가 문득, 그 물결들은 아스라이 마라도등대 역사의 물결과 오버랩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대부분 등대는 일본 침략 전쟁의 일환으로 설치됐다. 일본이 대륙으로 가기 위한 이정표 역할을 한 것이다. 특히 110년 전통의 마라도등대는 태평양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 1944년 8월 10일 태평양전쟁 때 괌이 함락되고 필리핀이 함락되자 일본은 패전을 눈앞에 두고 유리한 조건에서 전쟁을 끝내려 했다.
그런 일본군은 본토 결전 준비의 일환으로 마라도 맞은 편 송악산에 진지 동굴을 조성했다. 해안 방어, 연합군 상륙 저지가 목표였다. 이 동굴은 병력 은폐, 무기·보급품 저장고 역할을 했다. 일부 동굴은 포대를 설치하거나 특공대 침투용으로 설계됐다.
당시 현지 주민들은 이 동굴 작업을 위해 강제 동원돼 맨손 또는 간단한 도구로 굴착했다. 내부에 여러 갈래로 이어진 통로, 포진지, 탄약고 흔적이 확인됐다. 이런 동굴은 송악산 정상 및 해안 절벽에 중첩적으로 위치한다.

송악산과 마라도는 직선 거리로 약 5km 장도로 시야 확보가 가능하다. 군사 감시 및 조기경보 체계 구축에 유리한 해안지형이다. 그래서 마라도등대는 감시용 망루 또는 통신 기지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마라도등대는 유인등대인데 1915년 3월에 가스를 이용한 무인등대로 첫 불을 밝혔다. 일본군이 주변 작은 섬들과 교신하기 위한 군사통신기지 역할을 했다. 각국 해도에 표시되어 있을 정도로 세계적인 등대이다.
마라도등대는 10초마다 한 번씩 불빛을 비춘다. 불빛이 가 닿는 거리는 38km. 비바람이 치고 안개가 끼면 불빛 없는 바다에 공기압축기로 30초 동안에 5초 동안 사이렌 소리를 울리고, 25초 동안 멈췄다가 다시 소리를 울리는 방식의 신호를 보낸다. 이 소리가 전달되는 거리는 5마일 즉 8km 거리이다.
70~80년대 마라도등대에 근무한 등대원 삶은 매우 척박했다. 마라도 등대소장을 지낸 이송균 선생은 “숙소 불을 지피기 위해 말똥과 해안가 잡초, 이름 모를 해초들이 말라비틀어진 것들을 주워다가 불쏘시개로 사용했다.”면서 “먹고 사는 일도 힘들어 아내는 마라도 아낙들과 물질을 나가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표류하는 어선을 발견해 석유를 제공하고 구조한 일화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현재 등대원들은 항해선박의 안전을 위한 광파, 음파, 전파표지 운영과 항로표지집약관리시스템을 운영한다. 태양전지와 풍력‧디젤발전기를 이용한 자가발전에 필요한 모든 장비의 보수와 운영을 담당한다. 마라도 부근 5기의 무인등대(표지)를 야간에 원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하루에 세 차례씩 점검한다.

마라도등대는 제주도 남부 해역과 동중국해를 오가는 선박들의 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고 밤바다 항해를 돕는 희망봉 등대의 역할을 한다.
등대 앞에는 세계 유명 등대의 모형을 만들어 전시한 세계등대마당이 조성돼 있고, 대리석 세계지도 및 등대미니어처 광장도 마련돼 있다. 선착장이 있는 서쪽에서 등대로 가는 길은 띠 풀과 억새로 우거져 등대 모습이 풍경화 속의 한 장면 같다.

글‧사진: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