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시인의 시와 삶(1)

거센 물살 헤치는 생명의 시와 삶
박상건 기자 2024-05-23 15:08:37
신경림 시인(본명 신응식)이 지난 22일 별세했다. 내가 신경림 시인을 처음 뵌 것은 1997년 <샘이깊은물> 편집부장 시절 ‘그이의 사는 법’이라는 열 두 페이지짜리 인터뷰 때이다. 시인과 이틀 동안 작가회의와 남한강 등을 동행 취재했고, 이후 <여성동아> 시인탐방과 <오크노> ‘참지성인을 찾아서’ 기획 인터뷰를 더했다. 시인은 이성부 시인과 섬문화연구소 고문으로도 활동했고 신경림 시인의 소속인 무명산악회와 이성부 시인과 내가 소속된 만고산악회가 함께 등반하기도 했다. ‘신경림 시인의 시와 삶’을 2회에 결쳐 싣는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이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까맣게 몰랐다.

 
우리시대 영원한 애송시 ‘갈대’ 전문이다. 흔들리며 생각하고 안으로 진한 속울음을 울며 살아가는 갈대 같은 사람들. 시인 신경림은 이 시를 56년 <문학예술>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문학열병을 앓았던 충주고 시절에 수업보다는 남한강에 대한 애정이 더했던 시인. 국어시험 시간에는 시험지 대신 시 한편을 제출해 점수를 대신 받을 정도였다. 시인의 이런 방랑시인의 기질을 물러준 사람은 피리를 잘 불고 산과 여행을 좋아했던 당숙이었다. 그렇게 대학시절 문단에 등단한 시인이었지만 번역 일감만으로 지독한 가난과 함께 하는 서울생활이며 문단에 대한 회의감을 감당하기에는 힘에 부쳤다. 그래서 결국 낙향을 선택한 후 본격적인 문학 활동은 10년 후에 재개했다.

신경림 시인


동시대 민초와 함께 흔들리며 이 산하 보듬고 노래해온 시인 

낙향으로부터 시작된 드라마틱한 삶의 여정은 처음부터 역경의 시작이었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민중문학의 가장자리에 우뚝 선 채 민중적 서정시를 끈끈하고 생동감 있게 노래하며 오늘에 이르게 하는 데는, 그 삶을 역류하지 않고 당당하고 도도하게 흘러온 삶의 강물 탓이었으리라. 그 해 겨울이었다. <샘이깊은물> ‘그이의 사는 법’을 취재하기 위해 남한강 갈대밭을 거닐며 문학과 삶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자상하면서도 자기주장이 분명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저 강물의 흐름이 시인의 삶의 궤적이며 상징 같은 거라고…. 잔돌을 휘어 돌고 뛰어 넘으면서 속으로 뒤척이고 울부짖고 저항하면서 버겁지만 묵묵히 흘러가는 강물…. 시인은 그렇게 강물처럼 살아온 것이다. 끈끈한 생명력의 시와 인생을 한 줄기 강물로 일체감을 이루어 흘러온 것이다.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이랴. 곡절의 시대마다 흔들리는 갈대처럼 문학의 순수와 지식인의 양심을 버리지 않은 채 동시대 민초들과 함께 흔들리며 이 산하를 보듬고 노래해온 시인 신경림. 

 
시인의 고향은 충북 충주시 노은면 연하리이다. 낙향 후 별다른 대안이 없어 선택은 오직 하나. 애오라지 먹고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막일을 했다. 농사며 광산 일, 등짐장수, 학원 강사며 공사판 일 등 안 해본 일이 거의 없었다. 

 
“역경의 세월들이었군요?”고 말하자, “무슨 놈의… 그 때 세대치고 고생 안 해본 사람 어디 있겠어?”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찌 질기디 질기고 쓰디쓴 그 세월들을 이 한마디로 받아넘길 수가 있으랴. 시인은 다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당시 문단에서는 신이니 존재니 하는 알쏭달쏭한 시들이 판을 쳤어. 정치적으로는 조봉암 진보당 사건이 터져서 사회적으로 미칠 파장이 두렵기도 하고… 보따리 싸 짊어지고 내려간 고향집은 아버지 사업 실패로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었고, 이 집, 저 집에서 보리쌀을 꾸어 먹다 못해 꽃밭에서 작약을 캐어 팔기도 하고….” 

 
그렇게 무릎까지 차오르는 눈길 백리를 걸으며 장사꾼들 길 안내하는 일을 하기도 하고 댐 공사판에서 밀차에 흙을 실어 나르는 일을 하기도 했는데 열 번을 실어 날라야 점심 한 그릇 값을 받아내곤 했단다. 일이 끝나고 주막에 들러 장화를 벗으면 발은 늘 벌겋게 부어오르곤 했다. 다시는 시를 쓸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 오동나무 전등에 매어달린 가설무대 /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 꽹과리를 앞장 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농무’ 전문이다. 징이 울린다, 분이 얼룩진 얼굴로,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날나리를 불거나, 어깨를 흔들거나… 이 시는 갈대를 발표한 지 15년 만에 나와 한국 시단의 한 획을 그었다. ‘창비시선’ 1호였다. 처음엔 자신의 돈으로 삼 백부를 찍었던 이 시집이 나중에 <창작과 비평>을 통해 세상에 큰 눈 벌겋게 뜨며 한국 시단의 흐름을 주도한 것이다. 

 
신경림 시인

시인의 온몸으로 씌어진 이 시집은 대학가에서 90년 초까지 이념서클의 교과서로써, 전국의 많은 문학지망생들의 시 창작 교과서로 동시에 각광받았다. 지금도 매년 잘 팔리는 롱런 스테디셀러. 궁핍하기 그지없는 농촌 현실을 고발하고 집단적으로 저항하는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강하게 드러내면서도 농악이라는 풍물 이미지와 민요가락으로 전통 정서를 차용했다. 그렇게 민족문학이라는 뜨거운 이념 논쟁 속에서도 문학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던 작품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진정한 시문학의 표징으로 통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단의 평가가 시인이 오늘날까지 높게 평가받아야 할 배경이자 이유이리라.

 
유랑민들의 정서와 풍경을 구성진 민요가락으로 불러 제켜

다시 말해서 집단 저항을 노래하면서도 예술의 근간이랄 수 있는 문학성, 순수성, 서정성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농촌 현실을 고발하면서도 농민들과 늘 함께 하고 계몽하려 들지 않았다. 이녁과 민중적 삶의 일체화로 걷고 걸었다. 격정적 시어들이지만 모국어와 전통 민요가락을 채집하고 이를 詩라는 문학 장르로 되살리는 노력은 줄기차게 이어와 한국문학의 전통정서를 지켜온 것이다. 이런 시인의 모습은 격한 구호성 시에 빠진 당시 참여 시인들과는 크게 대조를 이루며 문단의 장수비결로 평가받았다. 

 
시인은 2000년 5월 문예진흥원 강당 특강에서도 이런 말을 했다. “외국에는 나이 들어서도 좋은 시를 쓰는 사람들이 많은데, 39세의 젊은 날까지 근사한 시를 쓰다가 나이 들어 집안의 유산을 챙긴 후 쓰레기만 남긴 워즈워드 같은 사람들이 많다”라고. 어쨌든 시인의 문학에 대해 백낙청 교수는 “운문은 산문으로서 손색이 없고 시행들은 산문으로 고쳐 놓았을 때 그 진가가 드러날 만큼 우리말에 내재하는 운율에 밀착되어 있다”라고. 한결같은 삶의 궤적과 문학적 성과물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한마디로 시인의 시에는 굴절의 한국사가 베여 있다. 그래서 시인의 시는 민중의 역사이자 우리네 슬픈 역사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아득하고 버거운 우리네 농촌 현실을 극명하게 그리기도 하고 고향의 정겨운 얼굴과 인정이 출렁인다. 그것이 실핏줄처럼 도드라져 장엄한 가락으로 물결친다. 그것이 시인의 시 세계의 특징이며 그런 작품 중의 하나가 ‘목계장터’이다
 

하늘은 날더라 구름이 되라 하고 /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하네 /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하네 /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려 /민물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목계장터’ 전문)

 
동국대 학술관 앞 신경림 시비


시집 ‘새재’에 수록된 이 시는 1976년에 쓴 작품이다. 이 시를 새긴 시비가 동국대 학술관 앞에 세워져 있다. 목계장터는 충주호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각종 세곡들을 이곳에서 실어 마포나루까지 옮겼던 곳. 지금은 목계교라는 작은 다리로 이어져 그 때 그 풍경은 구름처럼 바람처럼 사라졌지만 그 당시 이 고을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삶의 터전이었다. 시인의 성장배경이고 시의 배경이었다. 

 
그래서 유난히 장터 주변이 시의 배경으로 등장하고 이 시에서도 우리말과 우리가락이 그런 풍경을 데불고 절절이 넘쳐난다. 그렇게 남한강 줄기를 따라 떠돌던 유량민들의 정서와 풍경이 구성진 민요가락을 타고 드라마틱하게 그려지고 있다. 장돌뱅이와 고향 사람들… 지금도 그 그리운 얼굴들이 선하단다.

 
“어릴 때부터 장에 가는 것을 무척 좋아했지. 할머니는 장터에서 국수틀집을 했는데 꼭 나를 데리고 다녔어. 장터에서 장터 아이들과 놀곤 했는데 장꾼들 잠재워지고 밥도 파는 여인숙집 아이, 국밥 팔고 술 파는 집 아이, 장터 기름틀 집 아이 등등… 특히 나는 여인숙과 국밥집 아이와 친했어. 그곳에 가면 여기저기서 모인 사람들의 별 희한한 이야기를 다 들을 수가 있었는데, 장꾼들이 짐을 풀고 나누는 이야기며 흥얼거리는 그 노랫소리를 누워서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지….”(다음호에 계속)

 
글‧사진: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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