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는 것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 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나며,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 유안진, ‘지란지교를 꿈꾸며’ 중에서

지란(芝蘭)은 영지와 난초를 말한다. 향기가 많은 풀들이다. ‘지란지교’는 벗과 벗 사이의 고상한 교제를 의미한다.
유안진 시인은 난초처럼 단아하고, 내적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인이다. 그런 정갈함은 젊은 시절 연꽃처럼 쓰디쓴 인생살이가 피워낸 것인지 모른다. 시인은 안동 양반가문의 딸로 태어나 유년기부터 홀로 외지생활을 했고 지독한 가난, 병고, 강사 시절을 헤쳐왔다. 예순을 훌쩍 넘긴 어느 날, 나는 여성지에 연재하던 작가 인터뷰를 위해 서울대 연구실로 찾았었다. 시인은 스승 박목월 시인을 떠올리며 주마등처럼 스치는 세월을 일깨우더니 “이제 시만 쓰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베스트셀러 시인 에세이작가로 유명세를 떨치던 시절에 ‘문학사상’ 편집장이 마감시간에 펑크 난 원고를 메꾸려고 유안진 시인에게 수필 한 편을 급히 청탁했고, 시인은 밤새 촛불 아래서 원고를 써내려갔다. 그렇게 명작이 탄생했다.
당시 이 글은 중고생 책받침과 공책에 인쇄돼 불티나게 팔렸다. 학교와 재수학원, 기업 등에서 명상의 시간이면 애국가에 버금 갈 정도로 전 국민의 암송 에세이로 통했다. 여기서는 내가 수필을 시적 운율로 구분하여 임의로 문장을 나눠 인용했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흉보지 않을 친구”,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인생은 그런 친구를 사귀는 여정이다. 지금 그런 친구가 있다면 성공한 인생인 셈이다.
여기에 인용하지 않았지만, 시인이 그리는 친구의 조건으로 “우리는 시기하는 마음 없이 남의 성공을 얘기하며,/경쟁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하되, 미친 듯 몰두하게 되기를 바란다./우리의 우정은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 같아서/요란한 빛깔과 시끄러운 소리도 피할 것”이다.
그런 친구라면, “많은 사람과 사귀는 것도 원치”않고 “일생에 한 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죽기까지 지속되길”바랄 뿐이다. 그렇게 사랑하던 친구가 이승을 떠난다면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나며,/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오늘은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흉보지 않을” 유안진 시인님에게 안부 전화 한통 드려야겠다.
글‧사진: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