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건 시인의 섬을 걷다] 우리 역사의 어제와 내일을 일깨우는 최초 등대섬, 팔미도

120년 등대섬의 애환이 전율하는 노을 속 풍경들
박상건 기자 2025-07-10 13:42:57
인천 앞 바다의 작은 무인도 팔미도. 팔미도는 인천항에서 남쪽으로 15.7km 떨어져 있다. 팔미도 북서 해역에 무의도와 용유도가 있고, 남동쪽으로 대부도와 영흥도, 그 옆으로 승봉도, 이작도, 덕적군도 등이 펼쳐진다. 이들 해역의 12개 정기여객선의 항로는 팔미도 등대를 중심으로 동서로 나눠 인천항을 오고 간다. 

 
팔미도(八尾島)는 큰 섬에서 뻗어내린 모래톱이 작은 바위섬인 소팔미도로 연결되는데, 그 모양새가 마치 여덟 팔(八)자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섬 전체가 대부분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팔미도 노을(사진=섬문화연구소DB)

 
팔미도 동쪽 해역 700m 지점에는 0.2m의 암초가 있다. 북서쪽 해역 180m 거리에 3.7m의 간출암, 서쪽 600m 거리에 4.9m의 간출암이 있다. 간출암은 썰물 때는 바닷물 위로 드러나고, 밀물 때는 바닷물 속에 잠기는 바위를 말한다. 

 
선박 항해에 가장 큰 걸림돌이 암초다. 팔미도 등대는 이들 해역을 항해하는 선박들이 암초지대를 벗어나 안전하게 기항지를 당도할 수 있도록 길라잡이 역할을 한다. 안개가 자욱한 날에는 무신호기 나팔소리를 통해 팔미도 위치를 알려, 항해자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 팔미도 등대는 1954년 8월 29일에 발동발전기 무신호기를 설치했다. 

 
그렇게 팔미도는 지정학적으로 인천항 관문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점 섬이면서, 군사작전지역의 역할을 수행하는 섬이다. 그래서 인천대교를 건설할 때 대형 항공모함이 신속히 다리를 통과할 수 있도록 교각 거리를 확보해 설계했다. 팔미도 북동쪽 항로는 10만t급의 대형 화물선에서 민간 여객선에 이르는 수 많은 외항선이 인천항으로 들어오기 전에 검역을 위해 닻을 내리고 머무르는 이른바 검역묘지(檢疫錨地)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 등대인  팔미도등대 전경과 전망대(사진=섬문화연구소DB)


 
팔미도 등대는 동서남북의 섬과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형태를 갖추고 있다. 팔미도 등대는 122년 역사를 자랑한다. 1903년 6월 1일 불을 밝힌 후 2003년에 새로운 등대로 대체됐다. 새 등대 바로 앞에 보존 중인 옛 등대의 등탑 높이는 7.9m로 역사적, 건축적 가치가 높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0호, 등대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등대인 팔미도 등대가 첫 불을 밝힐 당시는 석유 백열등이었다. 섬의 최고점은 58m에 불과하지만 정상에서 밝히는 작은 불빛은 먼 밤바다에서도 식별이 가능한 강렬한 빛 에너지를 발산한다.

 
팔미도 등대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대한제국에 불평등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을 맺은 후 등대 건설을 압박하는 과정에서 태어난 아픈 역사도 보듬고 있다. 일본은 강화도조약 이후 1883년 인천항을 개항케 했지만 인천항을 오가던 일본 선박들이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 변화가 심한 협수로와 암초로 인해 크고 작은 해난사고가 빈번해지자 등대 건설을 재촉했다.


팔미도, 선착장과 등대박물관(사진=섬문화연구소DB)
 

일제 강점기에 인천항은 신의주에서 군산, 목포, 여수, 부산에 이르는 뱃길과 해주에서 강화, 덕적도, 영종도, 당진, 당진, 아산, 당진에 이르기까지 서해의 모든 뱃길을 오가는 주요 항로의 기항지였다. 일본 시모네스키, 고베, 요코하마, 나가사키, 가고시마는 물론 대만, 대련, 압록강 하구의 안동현, 청도, 위해 등 국제항로의 연락선들이 드나들었다, 이러한 해상 교통노선은 경인철도라는 육상 노선을 통해 서울역으로 연결됐다.

 
조선 정부는 건축비가 없어 세관 금액에서 떼낸 일정 금액으로 콘크리트 등탑을 만들었다. 팔미도 등대 계단은 직선이다. 국내 다른 등대들이 나선형 계단인 점과는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옛 등대는 여전히 든든한 기품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당시 우리 건축 기술자들의 능력이 매우 뛰어났음을 방증한다. 옛 등대 아래로는 21.25㎢의 아주 작은 단층 목조건물이 있는데 당시 등대원들이 근무하던 사무실이다. 

 
선착장에서 등대로 가는 길은 예쁜 돌담길로 지금도 그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이 돌담 아래 등대 100주년기념 상징인 조형물 ‘천년의 빛’이 있고, 이 광장은 팔미도 앞바다를 유유히 미끄러지는 선박들의 항해와 서해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바다뷰 포인트이다. 

 
옛 등대 앞에 세워진 새로운 팔미도 등대의 등명기는 우리기술로 개발한 프리즘렌즈 대형 회전식이다. 이 불빛은 무려 50km 해역까지 비춘다. 팔미도 등대 불빛은 10초에 한 번씩 반짝인다. 이 불빛은 예나 지금이나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팔미도 옛 등대와 최근 전망대 형식을 갖춘 등대(사진=섬문화연구소DB)
 

팔미도 등대는 1950년 9월 15일 한국전쟁 당시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등대이다. 이런 상징적, 시대적 의미가 더해지면서 역사적 가치가 높고 다양한 각도에서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팔미도 등대는 맥아더 사령관이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기 전까지 북한군이 관리 중이었다. 인천 상륙작전을 위해서는 등대 역할이 필수적이었다. 마침내 9월 15일 새벽 2시 20분 한국 장병이 참여한 미 첩보부대 ‘켈로(KLO)부대’가 팔미도 등대를 탈환, 등대 불빛을 밝히면서 이를 신호로 영흥도, 덕적도 일대 8개국 연합군 7만 5000명 병력과 261척 함대가 인천으로 진격했다. 그렇게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다. ‘켈로(KLO)’는 ‘주한첩보연락처’(Korea Liaison Office)를 줄인 말로 미 극동군사령부가 운용한 한국인 특수부대 ‘8240부대’를 말한다.

 
등대 불빛에서 시작한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연합군은 13일만에 서울을 탈환, 즉 북한에 서울을 빼앗긴지 3개월만인 9월 28일 서울 수복의 전과를 올렸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작전을 펼친 데는 이 일대 지리에 밝은 우리 해병대가 참여해 동시 작전을 펼쳤다. 

영화 '인천상륙작전' 스틸컷(사진=섬문화연구소DB)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다. 팔미도 등대는 우리 역사와 문화, 경제적 삶을 함축하고 이를 반추케 희망의 불빛과 애환의 그림자를 상징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 경제력(GDP) 10위권으로 우뚝 섰다. 오늘도 등대는 후손들에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등대문화유산 1호의 위엄을 간직한 팔미도등대에는 등대전시관과 등대역사관이 조성돼 있다. 낙조 때 노을 속으로 항해하는 범선의 아름다운 풍경과 비상하는 갈매기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해질 무렵 팔미도 앞 바다는 인천 8경 중 하나인 ‘팔미귀선’의 해양무대이다. 

 
누구나 팔미도에 가면 이 환상적인 낙조를 감상할 수 있다. 팔미도는 오랫동안 민간인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다가 2009년 ‘인천방문의 해’를 기점으로 일반인에게 개방됐다. 팔미도는 ‘무인도서의 보전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이용가능한 무인도에 해당한다. 

팔미도를 찾은 여행자들(사진=섬문화연구소DB)

 
섬문화연구소 주최 등대시인학교 시인들의 시낭송과 연주 장면(사진=섬문화연구소DB)


인천항 연안부두에서 출발하는 유람선을 이용하면 팔미도까지 약 50분 가량 소요된다. 섬을 천천히 둘러보는 데 40여분이면 족하다. 해안가로 넓게 펼쳐진 서어나무, 소사나무 군락지 사이의 둘레길을 걸으며 사색하고 명상하면서 삼림욕을 즐기면 좋다. 

 
팔미도에서는 해마다 섬사랑시인학교, 등대시인학교, 등대음악공연 등 다양한 문화예술 캠프가 열린다. 선착장 근처에서 선상낚시, 갯벌 고동잡기 체험 등을 즐길 수 있다. 팔미도는 ‘꽃보다 남자’, ‘남자의 자격’, ‘마마도’, ‘엄마가 뭐길래’,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글‧사진: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장)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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